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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율곡

김진호2526 | 2005-06-14 20:04 | 조회 0 | 답변 1

동방의 대현자 대현자 이율곡

 

[1536~1584] 강원도 강릉출생

10년뒤에 벌어질 일본의 침략을 예언하고 왕을 구한 조선의 관리이자 대현자

파주시 파평면 율곡리 산 100-1 임진강변이 내려다 보이는 수려한 경관에 위치해 있다.

율곡선생은 평소 자주 이곳 화석정에 들러 명상을 할 때면 하인에게 항상 기름걸레로 마루 바닥을 닦도록 시켰다고 한다.


이율곡 선생은은 국가에 전쟁이 날것을 미리 예언했다. 그의 나이 45세에 전쟁이 있을것을 미리 예언한 그는 당시 조선의 왕인 선조에게 장차 일본이 쳐들어 올것이므로 십만명의 정예군대를 양성할 것을 선조에게 간청올렸다. 그러나 그 주장은 당시 조선에서 10만명의 대병력을 양성할 경우 엄청난 군비의 문제로 경제가 파탄이 날수 있다는 반대주장에 막혀 좌절되었다. 임진왜란이 일어나기 10년전 이율곡선생이 사망하면서 유서를 남겼는데 "나라에 변고가 생겼을 때 열어 보라"하고 세상을 떠났다.


이율곡 선생이 사망한후 10년뒤 임진왜란이 벌어졌다. 당시 일본을 정복한 도요또미 히데요시는 내부의 군대들을 그대로 방치할 경우 반란이 일어날 수 있으므로 외부로 돌려 조선과 명나라를 정복하겠다며 정복전쟁에 나섰다.


100여년 이상 전쟁속에 살아온 이들 일본군대들은 조총이라는 신식무기와 함께 잘 훈련된 군대를 갖추고 있었다. 그당시 조선은 각 군대가 모여있지 않고 각 마을 단위마다 치안을 유지하기 위한 소규모의 군대만 흩어져 있었기에 밀려오는 수만명의 군대를 막아낼수 없었고 3일만에 서울의 부근까지 일본군들이 쳐들어오게 되었다.


이율곡 선생의 말대로 전쟁이 벌어지자 일어나 개성으로 도피하던 선조가 임진강에 도착했으나, 칠흙같은 밤에다 여름 장마철의 비가 많이 내려 횟불을 들고도 한치앞도 보이지 않았고 배가 어디있는지 찾을수가 없었다. 왜군들은 불과 하루 정도의 거리에 이미 당도해 있었다. .

 

한편 일본이 침략했다는 소식이 이율곡선생의 집에 전해지자 즉시 가족들은 율곡선생의 유서를 열어보았다. 그랬더니 “모월 모시 밤에 임진강변의 화석정에가서 불을 질러라” 라고 적혀 있었다. 영문을 알수 없었던 가족들이지만 율곡선생의 예언은 단 한번도 틀린적이 없기에 가족들이 가서 그대로 행했다.

  

아침이 되기전에 강을 건너야 하고 강을 건너야 일본군의 추격을 따돌릴수 있는 선조의 일행은 위기에 처했다. 서울로 들어오기 직전의 관문에 최후의 방어선을 쳤던 군대가 패전했다는 소식이 이미 전해졌던 것이다. 불과 몇시간이면 선조일행은 일본군에게 잡힐 위기에 처해 있었다. 선조와 서애 유성룡대감, 오성과 한음 대감 일행은 장대같은 빗속에서 횃불을 들고 배를 찾으러 다녔다.

  

그때 강건너편에서 불길이 치솟으면서 강일대가 환하게 밝아졌다. 이율곡이 전한 '화석정에 불을 지르라' 라는 유서대로 이율곡의 가족이 유서에 적혀있는 정확한 시간에 불을 질러 강가 일대는 대낮같이 환해진 것이다. 한여름 장마의 빗속에서도 평소에 기름을 먹인 정자는 잘 불타올라서, 선조일행은 무사히 배를 찾아 강을 건너 피신을 갈 수 있었다.


유성룡은 임진왜란 당시 선조임금을 모시고 개성으로 평양으로 의주로 피난을 다니다가 왜란이 평정된 뒤에 『징비록』을 남겼다, 이 책에서 '율곡은 참으로 성인이다. 만일 그의 말을 시행하였다면 나라 일이 어찌 이 지경에 이르랴! 또 그 전후의 계책을 혹 비난하는 사람도 있었지만, 지금은 그의 말이 모두 척척 들어맞는다. 만일 율곡이 있으면 반드시 오늘에 맞는 일을 할 것이니 참으로 오래 기다릴 필요도 없는 명백한 일이다.' 고 진술하면서 율곡의 정확한 예언을 듣지 않았던 것을 크게 후회하였다.


그당시는 교통이 발달되어 있지 않았으며 일본과의 교역도 거래도 활발하지 않아 다른나라의 사정을 알수가 없는 상태였다. 이율곡선생은 다음과 같은 사실을 미리 알고 있었던 것이다.

 

1. 10년전에 임진왜란이 발생할 날짜를 미리 알았다. 그때는 일본을 도요      도미 히데요시가 통일하기 전이다. 일본이 곧 통일 될것도 알았던것이다.

2. 일본이 3일만에 서울로 진격한다는 것과 자신의 수명도 미리 알고 있었다.

3. 한양함락 직전 밤에 비가 많이 내린다는것과 피난갈 시기를 알았다. 

4. 개성을 거쳐 의주까지 피난가는길을  정확히 알고 있었다는 것


이러한 이율곡선생에게 사람들이 알지 못하는 것이 있다. 이율곡선생에게도 스승격이 되는 사람이 있었다. 이율곡선생이 29세에 지었다고 알려진 『천도책』은 송구봉의 저서라는 설도 있다. 송구봉은 서자라서 관직에 등용될수 없었으며 서애 유성룡이 선조에게  천거하여 선조가 만나본적이 있었으나 무지몽매한 선조는 송구봉이란 조선 500년 역사에 드문 인재를 못알아보고 등용하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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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조1. 임진왜란(AD 1592년~1598년 2차에 걸친 일본이 조선을 침략한 전쟁)

 

일본은 이때 이미 유럽을 통해 총을 가지고 있었으나 조선에는 없었다. 초기에는 조선이 밀렸으나 세계역사 제일의 해군제독인 이순신장군은 우수한 대포무기를 가지고 있었다. 이순신장군에 의해 일본의 지원군과 보급군대가 바다에서 거의 몰살되었다. 이때 조선이 군대를 재정비하여 반격을 하였고 명나라의 4만 군대와 연합하여 승리한 전쟁이다.

 

그러나 엄밀하게 승리하였으되 조선에서 벌어진 전쟁이며 일본군을 몰아냈을 때는 반격할 수 있는 병력과 물자가 남아있지를 못했다. 더불어 수많은 사망자와 토지황폐화가 되었고 더불어 명나라 군대의 수탈과 약탈로 인해 조선은 처절한 이중고를 겪어 피해를 본 전쟁이 되어 버렸다.    

 

참조2 이율곡선생 요약

1548년(명종 3) 진사시에 합격하고, 19세에 금강산에 들어가 불교를 공부하다가, 다음해 하산하여 성리학에 전념하였다. 22세에 성주목사 노경린(盧慶麟)의 딸과 혼인하고, 다음해 예안의 도산(陶山)으로 이황(李滉)을 방문하였다. 그해 별시에서 <천도책(天道策)>을 지어 장원하고, 이 때부터 29세에 응시한 문과 전시(殿試)에 이르기까지 아홉 차례의 과거에 모두 장원하여 '구도장원공(九度壯元公)'이라 일컬어졌다.

 

동호문답(東湖問答)》 《만언봉사(萬言封事)》 《성학집요(聖學輯要)》 등을 지어 국정 전반에 관한 개혁안을 왕에게 제시하였고, 성혼과 '이기 사단칠정인심도심설(理氣四端七情人心道心說)'에 대해 논쟁하기도 하였다. 1576년(선조 9) 무렵 동인과 서인의 대립 갈등이 심화되면서 그의 중재 노력이 수포로 돌아가고, 더구나 건의한 개혁안이 선조에 의해 받아들여지지 않자 벼슬을 그만두고 파주 율곡리로 낙향하였다.

45세에 대사간(현재의 장관급의 중책) 의 직책을 맡아《기자실기(箕子實記)》 《경연일기(經筵日記)》를 완성하였으며 이때 '십만양병설'을 주장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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맛짱 | 답변 1498 | 채택률 75.2%

활동분야 : 음식,요리
본인소개 : '야호~!! 즐거운 요리시간이다~!!!' 카페지기http://cafe...
동방의 대현자 대현자 이율곡선생님의 관련 잘 보았습니다.
2005-06-22 16:57 | 출처 : 본인작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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