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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원 화성 지식머니 100

비공개 | 2009-12-03 18:30 | 조회 0 | 답변 14

수원화성에 대한 지식 좀 알려주세요......

빠른시일내에요.

이 질문에 답변하시면 지식머니 5, 채택시엔 130 을 더 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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피날레의 꿈 | 답변 391 | 채택률 97.7%

활동분야 : 생명과학 | 건강,인체상식
본인소개 : FINAL OF DREAM 안녕하세요. 피날레의 꿈입니다.

 

 

수원화성 

 

정조가 그의 아버지의 묘를 수원으로 옮기면서 축조한 성으로 거중기, 녹로 등 신기재를 사용해 만들어졌다. 화성은 군사적 방어기능과 상업적 기능을 함께 보유하고 있으며 실용적인 구조로 되어 있어 동양 성곽의 백미로 평가 받는다.

 

지극한 효심으로 축성된 근대 성곽건축의 백미
축성 당시 원형을 거의 그대로 간직하고 있는 수원 화성은 조선왕조 제22대 왕 정조가 선왕 영조에 의해 뒤주 속에서 불운하게 세상을 떠난 아버지 사도세자의 능을 양주에서 풍수지리학상 명당 자리인 화산으로 이전하고 그 부근 주민들을 팔달산 아래 현재 수원으로 옮기면서 축성되었다.
 
또한 화성은 임진왜란을 겪으며 그 필요를 절감한 수도 서울의 남쪽 방어기지로서의 역할뿐 아니라, 당쟁이 극심했던 정세를 쇄신하고 강력한 왕도정치를 실현하려는 정조 자신의 원대한 구상을 위한 새로운 개념의 계획적 신도시로 건설된 것이기도 하다.  

농축된 조선 시대 절정의 역량
따라서 극진한 효심을 기반으로 군사, 정치, 행정적 목적까지 모두 충족시켜야 하는 화성의 건설에 당대 동서양의 과학과 기술의 성과가 총결집되었고, 단원 김홍도를 비롯한 예술가들, 번암 채제공과 실학의 거두 정약용을 포함한 당대 최고의 지식인들이 참여했다. 그 결과 화성은 근대 초기 성곽건축의 백미로 평가받고 있다. 
 
성벽의 외측을 쌓되 내측은 자연의 지세를 이용해 흙을 돋우어 메우는 외축내탁의 축성술, 실학사상의 영향을 받아 화강석과 벽돌을 함께 축성의 재료로 사용한 전석교축, 목재와 벽돌의 조화로운 사용, 거중기·활차()·녹로 등 근대적 기기의 발명과 사용 등 기능성과 과학성, 예술적인 아름다움까지 모두 갖추고 있어 조선 시대 절정의 문화적 역량을 유감없이 보여주고 있다.
 
성벽을 따라 펼쳐진 건축물들의 향연
축성의 전과정을 상세하게 기록하고 있는「화성성역의궤」에 따라 일제 강점기한국전쟁, 홍수 등을 거치며 일부 파손되고 손실된 부분을 복원한 화성은 거의 6km에 달하는 육중한 성벽을 따라 마흔 개 이상의 시설물을 갖추고 있다.
 
당시의 모습을 그대로 간직하고 있는 팔달문()과 화성의 북문이자 정문인 장안문()을 포함한 4대문, 화성행궁의 중심이자 정조가 어머니 혜경궁의 회갑연을 치르기도 했던 봉수당(), 두 번이나 방화로 소실되었다 복원된 서장대(西), 남북으로 흐르는 수원천의 범람을 막아주는 동시에 방어적 기능까지 갖춘 북수문인 화홍문(), 망루와 포루의 역할을 동시에 하는 독특한 시설물인 공심돈(), 군사적 목적의 이름으로는 동북각루이지만 가장 아름다운 건물인 방화수류정(), 자체 방어시설까지 갖춘 봉수대인 봉돈, 샛문인 암문 등이 그 자태를 뽐내고 있다. 수원시는 매년 10월 화성문화제를 개최해 정조의 효심과 화성을 기리고 있다.

2009-12-03 19:04 | 출처 : 백과사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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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수환(and***) | 답변 13 | 채택률 100%

활동분야 : 해당 분야가 없습니다.
본인소개 : 입력된 정보가 없습니다.

화성은 조선왕조 22대 임금인 정조가 선왕인 영조의 둘째 왕자로 세자에 책봉되었으나 당쟁에 휘말려 왕위에 오르지 못하고 뒤주 속에서 억울하게 죽은 아버지 사도세자의 묘를 양주의 배봉산에서 수원의 화산(화성군 태안읍 소재)으로 옮기면서 만든 성으로, 1997년 12월 유네스코에 의해 세계문화유산으로 지정된 세계적 문화재이다.

화성은 정조가 당쟁의 소용돌이 속에서 억울하게 죽은 아버지 사도세자의 억울함을 풀어주고 당파정치의 근절과 강력한 왕권의 행사라는 원대한 포부 아래에서 만들어 졌다. 즉 군사적 목적보다는 정조 개혁정치의 상징적인 과업으로서의 정치 · 경제적 측면과 함께 부모에 대한 효심에서 축성된 것이다.

1789년 현륭원(사도세자의 묘소)에 능행(陵幸)할 때 한강에 배다리(舟橋)를 만들어 크게 공을 세웠던 다산에게 1792년(정조 16) 겨울, 이번에는 城의 규제(規制)를 지어 올리라고 하였다. 당시 아버지의 상을 당해 삼년상을 치르고 있던 다산은 정조의 명을 받들어 여러 책들을 참고로 하여 독창적인 규제를 만들어 많은 시간과 경비를 절약하게 하였다. 정조가 규장각에서 찾아내 하사한 淸의《거금도서집성 古今圖書集成》에 실린 <기기도설 奇器圖說>을 비판적으로 연구하여 성을 쌓을 때 가장 힘든 무거운 돌을 쉽게 나르기 위해 거중기를 설계하였다. 덕분에 일반백성을 부역에 전혀 동원하지 않고 임금노동자인 모군(募軍)만으로 성을 건설할 수 있었다. 뿐만 아니라 엽전 4만냥을 절약하고 공사기간을 7년 이상이나 단축시켜 경제적으로도 크게 기여하였다.

사도세자의 묘지를 화산으로 이장한지 5년 뒤인 1794년, 다산의 규제를 바탕으로 하여 채제공의 총괄아래 짓기 시작하여 2년 9개월 만인 1796년 9월, 총둘레 5,744미터 면적 139ha의 성이 완공되었다. 화성은 축조이후 일제의 강점기를 지나 한국전쟁을 겪으면서 성곽의 일부가 파손되었으나, 1975년부터 1979년까지 축성직후 발간된 "화성성역의궤 華城城役儀軌"에 의거하여 대부분 축성 당시 모습대로 보수 · 복원하여 현재에 이르고 있다.

-거중기:역학적인 원리를 이용하여 무거운 물체를 들어올리는 데 사용하던 기계. 조선시대 정조 때에 수원성곽을 쌓는 데 사용되었으며, 정약용(丁若鏞)의 《기중도설 起重圖說》에는 그림과 함께 설명되어 있는데 도르래를 이용하여 물체를 들어올리게끔 되어 있다.
거중기는 여러 개의 활차를 이용하여 무거운 물체를 적은 힘으로 들어올리도록 고안한 장치이다. 다산은 독일인이 지은 ‘기기도설’이라는 책에 실린 서양의 기구를 고안한 것이다. 이렇게 백성들의 수고를 덜어 주고 공사의 효율을 높이기 위해 거중기 등을 고안한 점은 당시 실학파 학자들의 위민사상을 잘 반영하고 있다.

-화성성역의궤 (규장각도서):조선 정조 18년(1794) 1월부터 정조 20년(1796) 8월에 걸친 화성성곽 축조에 관한 경위와 제도 · 의식 등을 기록한 책. 

2014-08-18 14:01 | 출처 : 본인작성

순형최고 | 답변 52 | 채택률 54%

활동분야 : 해당 분야가 없습니다.
본인소개 : 입력된 정보가 없습니다.

수원화성은 자기 아버지 사도세자의 억울한 죽음을 푸는 동시에 왕권을 강화할려는 겁니다. 지은사람은 건축가 채채공  그다음 정조가 신임하는 신하   정3품의 참지 정약용이 지었습니다. 그 다음 노론파가  원한을 품어서 정조를 정순황후가 독살했답니다

2009-12-03 20:22 | 출처 : 본인작성

눈의 꽃 | 소개 | 답변

전문분야 : 숙제도우미 | 만화,애니 | 답변 6929 | 채택률 84.4%
본인소개 : 1:1질문은 숙제도우미탭에 하시면 빠른 답변이 가능합니다

 수원화성

 

정조가 그의 아버지의 묘를 수원으로 옮기면서 축조한 성으로 거중기, 녹로 등 신기재를 사용해 만들어졌다. 화성은 군사적 방어기능과 상업적 기능을 함께 보유하고 있으며 실용적인 구조로 되어 있어 동양 성곽의 백미로 평가 받는다.
국가 한국(Korea, South)
지정연도 1997년
유네스코분류 문화
테마분류 문화유산
소재지 경기도
좌표 N37 16 20 E127 00 30
지극한 효심으로 축성된 근대 성곽건축의 백미
축성 당시 원형을 거의 그대로 간직하고 있는 수원 화성은 조선왕조 제22대 왕 정조가 선왕 영조에 의해 뒤주 속에서 불운하게 세상을 떠난 아버지 사도세자의 능을 양주에서 풍수지리학상 명당 자리인 화산으로 이전하고 그 부근 주민들을 팔달산 아래 현재 수원으로 옮기면서 축성되었다.
 
또한 화성은 임진왜란을 겪으며 그 필요를 절감한 수도 서울의 남쪽 방어기지로서의 역할뿐 아니라, 당쟁이 극심했던 정세를 쇄신하고 강력한 왕도정치를 실현하려는 정조 자신의 원대한 구상을 위한 새로운 개념의 계획적 신도시로 건설된 것이기도 하다.  

농축된 조선 시대 절정의 역량
따라서 극진한 효심을 기반으로 군사, 정치, 행정적 목적까지 모두 충족시켜야 하는 화성의 건설에 당대 동서양의 과학과 기술의 성과가 총결집되었고, 단원 김홍도를 비롯한 예술가들, 번암 채제공과 실학의 거두 정약용을 포함한 당대 최고의 지식인들이 참여했다. 그 결과 화성은 근대 초기 성곽건축의 백미로 평가받고 있다. 
 
성벽의 외측을 쌓되 내측은 자연의 지세를 이용해 흙을 돋우어 메우는 외축내탁의 축성술, 실학사상의 영향을 받아 화강석과 벽돌을 함께 축성의 재료로 사용한 전석교축, 목재와 벽돌의 조화로운 사용, 거중기·활차()·녹로 등 근대적 기기의 발명과 사용 등 기능성과 과학성, 예술적인 아름다움까지 모두 갖추고 있어 조선 시대 절정의 문화적 역량을 유감없이 보여주고 있다.
 
성벽을 따라 펼쳐진 건축물들의 향연
축성의 전과정을 상세하게 기록하고 있는「화성성역의궤」에 따라 일제 강점기한국전쟁, 홍수 등을 거치며 일부 파손되고 손실된 부분을 복원한 화성은 거의 6km에 달하는 육중한 성벽을 따라 마흔 개 이상의 시설물을 갖추고 있다.
 
당시의 모습을 그대로 간직하고 있는 팔달문()과 화성의 북문이자 정문인 장안문()을 포함한 4대문, 화성행궁의 중심이자 정조가 어머니 혜경궁의 회갑연을 치르기도 했던 봉수당(), 두 번이나 방화로 소실되었다 복원된 서장대(西), 남북으로 흐르는 수원천의 범람을 막아주는 동시에 방어적 기능까지 갖춘 북수문인 화홍문(), 망루와 포루의 역할을 동시에 하는 독특한 시설물인 공심돈(), 군사적 목적의 이름으로는 동북각루이지만 가장 아름다운 건물인 방화수류정(), 자체 방어시설까지 갖춘 봉수대인 봉돈, 샛문인 암문 등이 그 자태를 뽐내고 있다. 수원시는 매년 10월 화성문화제를 개최해 정조의 효심과 화성을 기리고 있다.

2009-12-04 00:02 | 출처 : 백과사전

만복이ㅇㅅㅇ | 답변 36 | 채택률 38.1%

활동분야 : 수학,산수
본인소개 : 많이 오삼
화성

화성은 조선왕조 제22대 정조대왕이 선왕인 영조의 둘째왕자로 세자에 책봉되었으나 당쟁에 휘말려 왕위에 오르지 못하고 뒤주속에서 생을 마감한 아버지 사도세자의 능침을 양주 배봉산에서 조선 최대의 명당인 수원의 화산으로 천봉하고 화산부근에 있던 읍치를 수원의 팔달산아래 지금의 위치로 옮기면서 축성되었다.

화성은 정조의 효심이 축성의 근본이 되었을 뿐만 아니라 당쟁에 의한 당파정치 근절과 강력한 왕도정치의 실현을 위한 원대한 정치적 포부가 담긴 정치구상의 중심지로 지어진 것이며 수도 남쪽의 국방요새로 활용하기 위한 것이었다.

화성은 규장각 문신 정약용이 동서양의 기술서를 참고하여 만든 「성화주략(1793년)」을 지침서로 하여, 재상을 지낸 영중추부사 채제공의 총괄아래 조심태의 지휘로 1794년 1월에 착공에 들어가 1796년 9월에 완공하였다. 축성시에 거중기, 녹로 등 신기재를 특수하게 고안·사용하여 장대한 석재 등을 옮기며 쌓는데 이용하였다. 화성 축성과 함께 부속시설물로 화성행궁, 중포사, 내포사, 사직단 등 많은 시설물을 건립하였으나 전란으로 소멸되고 현재 화성행궁의 일부인 낙남헌만 남아있다.

화성은 축조이후 일제 강점기를 지나 한국전쟁을 겪으면서 성곽의 일부가 파손·손실되었으나 1975~1979년까지 축성직후 발간된 "화성성역의 궤"에 의거하여 대부분 축성 당시 모습대로 보수·복원하여 현재에 이르고 있다.

성의 둘레는 5,744m, 면적은 130ha로 동쪽지형은 평지를 이루고 서쪽은 팔달산에 걸쳐 있는 평산성의 형태로 성의 시설물은 문루 4, 수문 2, 공심돈 3, 장대 2, 노대 2, 포(鋪)루 5, 포(咆)루 5, 각루 4, 암문 5, 봉돈 1, 적대 4, 치성 9, 은구 2등 총 48개의 시설물로 일곽을 이루고 있으나 이 중 수해와 전란으로 7개 시설물(수문 1, 공심돈 1, 암문 1, 적대 2, 은구 2)이 소멸되고 4개 시설물이 현존하고 있다.

화성은 축성시의 성곽이 거의 원형대로 보존되어 있을 뿐 아니라, 북수문(화홍문)을 통해 흐르던 수원천이 현재에도 그대로 흐르고 있고, 팔달문과 장안문, 화성행궁과 창룡문을 잇는 가로망이 현재에도 도시 내부 가로망 구성의 주요 골격을 유지하고 있는 등 200년전 성의 골격이 그대로 현존하고 있다. 축성의 동기가 군사적 목적보다는 정치·경제적 측면과 부모에 대한 효심으로 성곽자체가 "효"사상이라는 동양의 철학을 담고 있어 문화적 가치외에 정신적, 철학적 가치를 가지는 성으로 이와 관련된 문화재가 잘 보존되어 있다.

성곽의 전돌, 건조물의 기와 등이 독특한 방법으로 제작되어 있어 현재의 기술로 이를 재현하기 어려워 보수시 문제점으로 나타나고 있으나 계속 연구해야 할 과제로 남아 있다.

화성은 중국, 일본 등지에서 찾아볼 수 없는 평산성의 형태로 군사적 방어기능과 상업적 기능을 함께 보유하고 있으며 시설의 기능이 가장 과학적이고 합리적이며, 실용적인 구조로 되어 있는 동양 성곽의 백미라 할 수 있다.

성벽은 외측만 쌓아올리고 내측은 자연지세를 이용해 흙을 돋우어 메우는 외축내탁의 축성술로 자연과 조화를 이루는 성곽을 만들었으며, 또한 화성은 철학적 논쟁 대신에 백성의 현실생활속에서 학문의 실천과제를 찾으려고 노력한 실학사상의 영향으로 벽돌과 돌의 교축, 현안·누조의 고안, 거중기의 발명, 목재와 벽돌의 조화를 이룬 축성방법 등은 동양성곽 축성술의 결정체로서 희대의 수작이라 할 수 있다. 특히, 당대학자들이 충분한 연구와 치밀한 계획에 의해 동서양 축성술을 집약하여 축성하였기 때문에 그 건축사적 의의가 매우 크다.

축성 후 1801년에 발간된 「화성성역의궤」에는 축성계획, 제도, 법식뿐 아니라 동원된 인력의 인적사항, 재료의 출처 및 용도, 예산 및 임금계산, 시공기계, 재료가공법, 공사일지 등이 상세히 기록되어 있어 성곽축성 등 건축사에 큰 발자취를 남기고 있을 뿐만 아니라 그 기록으로서의 역사적 가치가 큰 것으로 평가되고 있다.

화성은 사적 제3호로 지정 관리되고 있으며 소장 문화재로 팔달문(보물 제402호), 화서문(보물 제403호), 장안문, 공심돈 등이 있다. 화성은 1997년 12월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으로 등록되었다.


18세기에 완공된 짧은 역사의 유산이지만 동서양의 군사시설이론을 잘 배합시킨 독특한 성으로서 방어적 기능이 뛰어난 특징을 가지고 있다. 약 6km에 달하는 성벽안에는 4개의 성문이 있으며 모든 건조물이 각기 모양과 디자인이 다른 다양성을 지니고 있다.

등록기준 : 세계문화유산기준 (Ⅱ), (Ⅲ)

(Ⅱ) 일정한 시간에 걸쳐 혹은 세계의 한 문화권내에서 건축, 기념물조각, 정원 및 조경디자인, 관련예술 또는
      인간정주 등의 결과로서 일어난 발전사항들에 상당한 영향력을 행사한유산
(Ⅲ) 독특하거나 지극히 희귀하거나 혹은 아주 오래된 유산

 
2009-12-04 18:35 | 출처 : http://www.cha.go.kr/main/Ko...

애국자모임 | 답변 165 | 채택률 33%

활동분야 : 환경 | 역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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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원 화성

위키백과 ― 우리 모두의 백과사전.

화성 행궁*
유네스코 세계유산

화성 행궁
소재국 대한민국
영어* Hwaseong Fortress
프랑스어* Forteresse de Hwaseong
등록 구분 문화유산
등록 구분 {{{유형}}}
기준 Ⅱ, Ⅲ
지정번호 817
지정번호 {{{등록번호}}}
지역** 아시아·태평양
지정 역사
지정 1997년  (21차 정부간위원회)
웹사이트 화성 행궁 공식홈페이지
* 세계유산목록에 따른 정식명칭.
** 유네스코에 의해 구분된 지역.

화성(華城)은 경기도 수원시 팔달구장안구에 걸쳐 있는 길이 5.4킬로미터성곽이다. 1963년 사적 3호로 지정되었으며, 1997년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으로 등록되었다. 수원 화성은 한국 성의 구성 요소인 옹성, 성문, 암문, 산대, 체성, 치성, 적대, 포대, 봉수대 등을 모두 갖추어 한국 성곽 건축 기술을 집대성했다고 평가된다.[1]

 

//if (window.showTocToggle) { var tocShowText = "보이기"; var tocHideText = "숨기기"; showTocToggle(); } //

[] 축성

조선 후기 정조때인 1794년 착공하여 1796년 9월 10일에 준공되었다. 억울하게 세상을 떠난 아버지 사도세자를 기리기 위해 그 무덤을 최고의 명당 터로 옮긴 정조는 그 인근에 신도시인 화성을 건설했다. 기존에 화강암으로 쌓았던 방식을 버리고 벽돌로 쌓는 축성 공사에는 정약용이 고안한 거중기가 사용되었다.

정조가 그의 아버지의 묘를 수원에 옮기면서 축조한 성으로 거중기, 녹로 등 신기재를 사용해 만들어졌다. 화성은 군사적 방어기능과 상업적 기능을 함께 보유하고 있으며 실용적인 구조로 되어 있어 동양 성곽의 백미로 평가 받는다.

[] 주요 시설

화성은 돌로 성곽을 쌓은 석성이다. 네 개의 대문과 다섯 곳의 암문, 두 곳의 수문이 있다.

대문으로는 장안문(북문), 팔달문(남문), 창룡문(동문), 화서문(서문)이 있다. 네 개의 대문 모두 옹성을 둘러 적이 쉽게 문을 부수지 못하도록 하였다. 성곽에는 돈대, 각루, 공심돈, 적대, 장대등 적의 침입을 방비하는 시설을 갖추었다.

암문으로는 서남암문, 남암문, 서암문, 동암문, 북암문이 있으나, 그 중 남암문만 복원되지 않았다.

[] 장안문(長安門)

장안문은 화성의 북문이자 정문이다. 보통 성(城)의 남문을 정문으로 삼으나, 화성은 임금을 가장 먼저 맞이하는 북문인 장안문이 정문이다. 잘 다듬은 화강암으로 쌓은 석축에 홍예문을 냈고 그 위에 정면 5칸 측면2칸의 다포양식으로 이루어진 중층의 문루가 세워져있다. 또한 가운데에 홍예문이 나있는 벽돌로 쌓은 옹성이 있으며, 양옆에 다른 성벽보다 높이가 약간 높은 두개의 적대를 설치하였다. 장안문의 이름은 중국의 옛 왕조인 전한(前漢), 수(隋), 당(唐)나라의 수도였던 장안(시안)에서 따온 것으로 이는 당나라 때의 장안성 처럼 화성 또한 융성한 도시가 되라는 정조의 뜻이 담겨져 있다.

[] 팔달문

팔달문(八達門)은 화성의 남문으로 전국 각지로부터 사람과 물산이 모이고 흩어진다는 뜻이다. 현재는 좌우의 성벽이 헐려 길이 생기고 건물들이 들어서면서 번화가가 형성되었다. 축대위로 누각이 서 있는데 2층으로 지어져 매우 높게 보인다.

[] 창룡문

창룡문(蒼龍門)은 음양오행설에서 푸를 '창'자가 동쪽을 의미한다는 데에서 이름이 유래하였다. 한국전쟁 당시 크게 소실된 것을 1978년 복원하였다. 홍예의 크기만을 놓고 볼 때는 장안문보다 더 크다.

[] 화서문

화성의 서쪽에 좌우 성벽에 연결되는 석축에 무지개 모양의 문양의 문을 내고 그 위에 단층 구조의 문루가 있는데 이것이 화서문(華西門)이다. 화서문의 옆에 서북공심돈(西北空心墩)이 있는데 사람이 안으로 들어가 경계할 수 있도록 높게 지어진 망루로 벽면 곳곳에 나 있는 구멍으로 활과 포도 쏠 수 있다.

 화홍문

화홍문(華虹門)은 화성의 북동쪽에 위치하고 있는데, 홍수를 대비하여 수원천 위에 세워진 북수문이다. 인근의 방화수류정과 함께 화성에서 가장 경관이 뛰어난 곳으로 꼽히는 곳이다.

 서장대와 서노대

서장대(西將臺)는 팔달산의 정상에 선 망대로 사방 100리가 내려다 보인다. 정조는 이곳에 올라 군사훈련을 지켜보았다. 화성장대(華城將臺)라는 편액은 정조가 직접 쓴 것으로 알려져 있다.

서장대 바로 옆에는 서노대(西弩臺)가 서있다. 서노대는 성 한가운데서 다연발 활인 쇠뇌를 쏘기 위하여 높이 지은 곳으로 정팔각형꼴로 전벽돌을 쌓아놓았다.

2010-01-22 19:09 | 출처 : 위키백과

  • 스피돌이님 11.08.11

    되게열심!!!!!!!!!!!!!!!!!히햇음!!!!!!!!!!!!!!!!!!!!!!!!!!!!!!!!!!!!!!!!!!!!!!!!!!!!!!!! 댓글 | 신고

꿈쟁이(musi*******) | 답변 0 | 채택률 0%

활동분야 : 해당 분야가 없습니다.
본인소개 : 입력된 정보가 없습니다.

 이런건 스스로의힘으로...하면어떨까여??

 

2010-04-21 22:58 | 출처 : 본인작성

심심해 쿨 | 답변 3 | 채택률 50%

활동분야 : 어린이 지식
본인소개 : 입력된 정보가 없습니다.


 

 

화성과 화성행궁은 다릅니다.

 


 


 

화성안의 일부분이 화성행궁인셈인거죠.

 

정조대왕이 화성에 왔다가 능행차로 쉬어 간곳이 화성행궁이라고 합니다.


 

 

이 사진에 보면 수원화성운영재단과 홍보관등 있는데 이곳에서 많은 정보를 얻으실수 있으실 겁니다.

 

 

과학적인 면

 

  수원성은 기존의 성제와 중국의 이론들을 섭렵한  정약용이 구체적인 형태부터 공사법, 임금관리, 재료, 기계발명에 이르기 까지 새롭고도 합리적인 대안들을 빠짐없이 제안했다.

처음에는 벽돌 사용을 경제적인 이유로 배제하였으나 부분적으로 사용한 것은 대포 등에 의해 파괴될 때 석조는 완전히 무너지지만 조적 조는 부분적 파손과 부분보수가 가능하기 때문이다.

 

수원화성은 중국, 일본 등지에서 찾아볼 수 없는 평산성의 형태로 군사적 방어기능과 상업적 기능을 함께 보유하고 있으며 시설의 기능이 가장 과학적이고 합리적이며, 실용적인 구조로 되어 있는 동양 성곽의 백미라 할 수 있다.

성벽은 외측만 쌓아올리고 내측은 자연지세를 이용해 흙을 돋우어 메우는 외축내탁의 축성술로 자연과 조화를 이루는 성곽을 만들었으며, 또한 수원화성은 철학적 논쟁 대신에 백성의 현실생활속에서 학문의 실천과제를 찾으려고 노력한 실학사상의 영향으로 벽돌과 돌의 교축, 현안·누조의 고안, 거중기의 발명, 목재와 벽돌의 조화를 이룬 축성방법 등은 동양성곽 축성술의 결정체로서 희대의 수작이라 할 수 있다.

특히, 당대학자들이 충분한 연구와 치밀한 계획에 의해 동서양 축성술을 집약하여 축성하였기 때문에 그 건축사적 의의가 매우 크다.

 

그리고 화성 건설시에 거중기 이외에 녹로 라는것도 사용되었는데

 

녹로

활차(滑車 : 도르래)를 이용하여 무거운 물건을 들어올리는 데 쓰이던 기구.

조선 후기에 성을 쌓거나 큰 집을 지을 때 사용하였다.

각목으로 네모난 틀을 만들고 틀의 앞쪽으로 긴 지주(支柱) 구실을 하는 간목(竿木) 둘을 비스듬히 세운 다음, 간목 꼭대기에는 활차를 달고 나무틀의 뒤쪽에는 얼레를 설치하여 동아줄을 얼레와 활차에 연결하고 줄의 반대쪽에 물건을 달아맨 뒤, 얼레를 돌려 줄을 감으면서 물건을 들어올리도록 한 것이다.

1796년(정조 20) 수원성곽을 쌓을 때에는 두 틀을 만들었다고 하는데, ≪화성성역의궤 華城城役儀軌≫에 의하면 틀의 크기는 세로 15척, 높이 10척이고 간목의 길이가 35척으로, 여덟 사람이 둘로 나뉘어 얼레를 좌우에서 돌려 물건을 올리고, 적당한 높이에 올라가면 줄 갈고리로 끌어서 원하는 자리에 옮긴 다음 다시 얼레를 늦추어 물건을 내리도록 한다고 하였다.

간주(竿柱)를 높이 세우고 그 꼭대기에 활차를 달고 동아줄을 걸어 밑에서 한쪽 줄을 잡아당겨 물건을 높이 올리는 것은 오래전부터 깃발을 세우는 일 등에 쓰이던 것인데, 조선 후기에 와서 무거운 돌을 들어올리는 데 그 원리를 응용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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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1-04-17 15:54 | 출처 : 본인작성

강산아(sana****) | 답변 1 | 채택률 1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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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홍문

화홍문(華虹門)은 화성의 북동쪽에 위치하고 있는데, 홍수를 대비하여 수원천 북쪽에 세워진 수문이다. 7개의 수문이 있고, 남수문과 달리 누각이 있다. 또 수원팔경 중의 하나이다.

 남수문

남수문(南水門)은 현 지동시장 근처 수원천에 있는데, 수원천 남쪽에 있다. 현재 미복원이다.

 장대와 노대

 서장대 (화성장대)와 서노대

서장대

서장대(西將臺)는 팔달산의 정상에 선 망대로 사방 100리가 내려다 보인다. 정조는 이곳에 올라 군사훈련을 지켜보았다. 화성장대(華城將臺)라는 편액은 정조가 직접 쓴 것으로 알려져 있다.

 

 

서노대

서장대 바로 옆에는 서노대(西弩臺)가 서있다. 서노대는 성 한가운데서 다연발 활인 쇠뇌를 쏘기 위하여 높이 지은 곳으로 정팔각형꼴로 전벽돌을 쌓아놓았다.

동장대(연무대)와 동북노대

동장대(연무대)
동북노대

동장대(東將臺)는 화성 창룡문 근처에 있는 장대로, 장용영 군대의 훈련 장소로 쓰였다. 여기서 활쏘기를 할 수 있다.

 공심돈 (空心墩)

 서북공심돈

서북공심돈

서북공심돈(西北空心墩)은 화서문의 옆에 있는 공심돈으로, 화살과 대포를 발사할 수 있다. 기록에 따르면 대포를 쏠 때, 어디서 총탄이 나오는지 알 수 없었다고 한다.

 동북공심돈

동북공심돈

동북공심돈(東北空心墩)은 창룡문의 근처에 있는 공심돈으로, 서북공심돈과 달리 원형이다. 높이 17척 5촌, 바깥 원 둘레 122 척, 벽돌로 된 부분의 두께 4척, 안쪽 원 둘레 71척, 내원과 외원 사이에 가운데 4척 5촌의 공간을 비워두고, 2층 덮개판으로 둘렀다. 아래 층 높이는 7척 3촌, 가운데 층 높이는 6척 5촌인데, 모두 군사들의 몸을 숨길 수 있게 하였다.

 남공심돈

남공심돈(南空心墩)은 팔달문의 근처에 있는 공심돈으로, 서북공심돈과 모습이 같으나 약간 더 작다. 현재 미복원이다.

 암문 (暗門)

 동암문

동암문

동암문(東暗門)은 동장대의 근처에 있는 암문으로, 북쪽을 바라보고 있다. 안쪽 너비는 7척 높이는 8척이고 바깥은 너비가 6척, 높이가 7척 5촌이다.

 북암문

북암문

북암문(北暗門)은 동암문에서 얼마 떨어지지 않은곳에 있으며, 방화수류정 근처에 있다. 안쪽은 너비가 4척 6촌 높이가 6척 5촌이고, 바깥 쪽은 너비가 4척 높이가 6척이다.

 서암문

서암문(西暗門)은 팔달산 서장대 근처에 있는 암문으로, 입구가 꺽여 있어서 찾기 힘들다. 안 쪽의 너비는 5척 6촌 높이는 7척 7촌, 바깥 쪽은 4척 1촌 높이는 7척 2촌이다.

 남암문

남암문(南暗門)은 남공심돈 근처에 있는 암문으로, 남공심돈처럼 미복원이다.

 서남암문

서남암문

서남암문(西南暗門)은 보통 암문과 달리 용도로 가기 위한 암문이다. 그래서 누각이 있다.

각루

북각루 (방화수류정)

방화수류정

동북각루(東北角樓)는 화홍문 바로 옆에 있으며, 용연이라는 연못 위에 있다. 화성의 시설물 중에서도 아름다워 방화수류정이라고도 한다.

[편집] 동남각루

동남각루

동남각루(東南角樓)는 남수문 바로 옆에 있으며, 높은 곳에 위치해 주위를 관찰하기가 쉽다.

 서남각루 (화양루)

서남각루

서남각루(西南角樓)는 용도 끝에 있으며, 화양루라고도 한다.

 서북각루

서북각루

서북각루(西北角樓)는 화서문 옆에 있으며, 동남각루와 마찬가지로 높은 곳에 위치해 주위를 관찰하기가 쉽다.

 봉돈

봉돈

봉돈(烽墩)은 봉화를 올리는 시설로, 다섯 개의 연기구멍이 있다. 밤에는 불, 낮에는 연기로 신호를 보냈다.

 포루(砲樓)와 포루(鋪樓)

포루(砲樓)와 포루(鋪樓)는 헷갈리기 쉽다.

포루(砲樓)는 공심돈과 비슷하게 치성처럼 돌출시킨 시설이고, 남포루(南砲樓), 동포루(東砲樓), 북동포루(北東砲樓), 북서포루(北西砲樓), 서포루(西砲樓) 등이 있다.

북포루

포루(鋪樓)는 치성 위에 누각을 세운 것이다. 동북포루(東北鋪樓), 동일포루(東一鋪樓), 동이포루(東二鋪樓), 북포루(北鋪樓), 서포루(西鋪樓)등이있다.

 치(稚)

동이치

치는 성을 돌출시킨 이며, 凸모양으로 만들었다. 치(稚)라는 이름은 '꿩'이란 뜻으로 본래 꿩은 제몸을 숨기고 밖을 엿보기를 잘한다는 까닭에서 그 이름을 땄다. 남치(南稚), 용도일·이치, 서일치(西一稚), 서이치(西二稚), 서삼치(西三稚), 동일치(東一稚), 동이치(東二稚), 동삼치(東三稚) 등이 있다.

적대 (敵臺)

적대는 치와 비슷한 시설이며, 팔달문과 장안문 양 옆에 각각 두 개씩 있다. 북서적대(北西敵臺), 북동적대(北東敵臺), 남서적대(南西敵臺), 남동적대(南東敵臺)가 있다. 그 중 남서적대와 남동적대는 미복원이다.

 

 

 

 

 

 

 

 

사진

  장안문 야경  
  창룡문

 

  화홍문 
  봉돈
  화서문과 서북공심돈 
  서북각루 
  서남암루
  방화수류정
  서장대

 

 

 

2011-04-19 22:38

이쁘니(hana****) | 답변 32 | 채택률 5.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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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원성은 조선 정조 18년(1794)에 정조의 아버지 사도세자의 능을 양주에서 수원으로 옮기면서 짓기 시작하여 정조 20년(1796)에 완성한 성곽이다. 중국성의 모습을 본뜨기는 했지만 과학적인 방법으로 성을 쌓아 훨씬 발달한 모습을 하며 한국 성곽을 대표하는 뛰어난 유적이다.

화서문은 수원성의 서쪽문으로 문의 모든 시설과 크기는 동쪽의 창룡문과 거의 같은 구조로 되어있다. 네모 반듯한 큰 돌을 높이 쌓아 만든 축대 위에 1층의 건물을 세웠는데, 규모는 앞면 3칸·옆면 2칸으로 기둥 사이는 모두 개방되어 있다. 지붕은 옆면에서 볼 때 여덟 팔(八)자 모양을 한 팔작지붕 건물이고, 축대의 가운데에 무지개 모양의 홍예문과 문의 앞쪽에 벽돌로 쌓은 반달모양의 옹성이 있다. 옹성은 성문을 보호하고 성을 지키기 위한 구실을 하며 2중의 방어 효과를 갖는다.

또한 주위를 돌아가며 총이나 활을 쏘는 구멍이 뚫린 낮은 담을 쌓아 보호되도록 하였다. 옹성의 북쪽으로 조금 떨어진 곳에는 공심돈이 성벽을 따라서 연결되어 있다. 공심돈은 속이 텅 비었다는 뜻으로 지금의 초소 구실을 하던 곳이다. 안에는 계단을 따라 오르내릴 수 있고 층마다 바깥을 향해 총이나 활을 쏠 수 있도록 구멍이 있어 철저한 방어가 되도록 하였다.

한국의 다른 성곽 건축에서는 볼 수 없는 독특한 시설로서, 구조도 특이하며 화서문을 중심으로 일대의 경치에 한층 더 아름다움을 더해주고 있다.

2011-05-06 22:19 | 출처 : 본인작성

junshik | 답변 20 | 채택률 27.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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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약설명

조선시대의 성. 조선 22대 임금 정조가 아버지 사도세자에 대한 효심과 왕권 강화를 위한 수도 이전을 목적으로 쌓은 성이다.

실학자 정약용과 유형원이 설계를 하고, 좌의정 채제공의 주관 아래, 화성유수 조심태 등이 공사를 진행하여 성을 쌓은 후, 화성행궁, 중포사, 내포사, 사직단등의 건물을 지었다. 성곽을 석재와 벽돌을 섞어 쌓은 점, 거중기와 녹로 등 새로운 기기를 사용한 점, 화살과 창검, 총포 등을 방어하는 근대적 성곽 구조를 갖추고 있는 점 등에서 과학적이고 독창적인 당대 최고의 건축물로 평가 받고 있는 동시에 우리나라 성곽 건축의 백미로 꼽힌다.

“송충이도 씹어 먹은 정조의 효심”

정조는 화성으로 아버지의 묘를 옮긴 후 그 전보다 더욱 자주 찾아가 인사를 드리곤 했다고 한다. 그러던 어느 날 융건릉을 찾은 정조는 깜짝 놀라고 말았다. 묘 주변 소나무들이 송충이 때문에 다 죽어가고 있었던 것이다. 정조는 “어허, 이럴 수가. 내 땅에 사는 송충이가 어찌 임금의 아버지 앞에 있는 소나무 잎을 갉아먹는단 말이냐. 내 아버지가 비명에 가신 것도 가슴 아픈데 너희들까지 이리 괴롭혀서야 되겠느냐. 차라리 내 오장육부를 갉아 먹어라”라고 한탄하며, 송충이 한 마리를 잡아 입안에 넣고 깨물어 먹어버렸다. 그 일이 있은 후, 어디선가 새들이 날아와서 송충이를 다 잡아 먹어, 소나무에는 송충이가 한 마리도 남지 않았다는 일화가 전해진다.

상세설명

화성은 서쪽으로는 팔달산을 끼고 동쪽으로는 낮은 구릉의 평지를 따라 쌓은 평산성이다. 정조는 그의 아버지 장헌세자에 대한 효심에서 화성으로 수도를 옮길 계획을 세우고, 정조 18년(1794)에 성을 쌓기 시작하여 2년 뒤인 1796년에 완성하였다. 실학자인 유형원과 정약용이 성을 설계하고, 거중기 등의 신기재를 이용하여 과학적이고 실용적으로 쌓았다. 성벽은 서쪽의 팔달산 정상에서 길게 이어져 내려와 산세를 살려가며 쌓았는데 크게 타원을 그리면서 도시 중심부를 감싸는 형태를 띠고 있다. 성안의 부속시설물로는 화성행궁, 중포사, 내포사, 사직단들이 있었으나, 현재에는 행궁의 일부인 낙남헌만 남아있다. 특히 다른 성곽에서 찾아볼 수 없는 창룡문·장안문·화서문·팔달문의 4대문을 비롯한 각종 방어시설들과 돌과 벽돌을 섞어서 쌓은 점이 화성의 특징이라 하겠다. 화성은 쌓은 후 약 200여년이 흐르는 동안 성곽과 시설물이 무너지기도 하고 특히 한국전쟁을 겪으면서 파손되었는데, 1975년부터 보수, 복원하여 현재에 이르고 있다. 효심에서 근본이 되어 당파정치 근절과 왕도정치의 실현 그리고 국방의 요새로 활용하기 위해 쌓은 화성은 과학적이고 합리적이며 실용적인 구조를 갖고 있어, 1997년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으로 등재되었다.
※(화성 → 수원 화성)으로 명칭변경 되었습니다. (2011.07.28 고시)

2013-01-15 20:57 | 출처 : 본인작성

최민성(msch******) | 답변 2 | 채택률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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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로운 개념의 성, 수원 화성

정약용은 수원 화성이 다른 성곽과 차별화되도록 상업적 기능과 군사적 기능을 동시에 수행할 수 있는 평산성(平山城) 형태를 기본으로 했다. 한국의 성곽은 전통적으로 평상시에 거주하는 읍성과 전시에 피난처로 삼는 산성을 기능상 분리했는데, 수원 화성 성곽은 피난처로서의 산성을 따로 두지 않고 평상시에 거주하는 읍성의 방어력을 강화시켰다. 이 때문에 우리나라 성곽에서는 보기 드물게 많은 방어시설을 갖추고 망루는 물론 총안(銃眼), 즉 총구멍도 설치하여 적의 침입에 대비하는 등 성곽의 용도가 다양했다. 

 

특히 석성(石城)과 토성(土城)의 장점만 살려서 축성하였으며 제반 시설물은 지형 조건을 최대한 활용하여 효율적 방어가 가능하도록 배치했다. 팔달산 정상에 군사지휘소인 서장대를 두었으며 맞은편 높은 곳에 외부와의 통신시설인 봉수대를 벽돌로 만들어 세웠다. 화성 남북 단에는 장안문팔달문, 동서 단에는 창룡문화서문을 세우고 남서와 동북 방향 높은 지대에 각기 화양루와 동북각루를 세워 비상시 군사 요충이 되도록 했다.

 

화성의 또 다른 특징은 도시 기반 시설이다. 화성에는 팔달산 기슭의 행궁과 화성 유수부 앞에서 정면으로 용인 방면으로 이어지는 십자로 등 인근 지역과 연결되는 새로운 개념의 신작로가 만들어졌다. 이 십자로 주변에 상가와 시장을 배치하여 상업도시로서 화성의 성격을 명확히 했다. 정조는 화성을 물류경제와 국제무역의 새로운 중심지로 부상시키는 데 모든 힘을 쏟은 것이다.

2013-04-16 14:25 | 출처 : 본인작성

세훈이팬 | 답변 20 | 채택률 7.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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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인소개 : 엓팬임 ㅎ 엑소에 중독됐담 ㅇㅅㅇ

ㅋㄷㅋㄷ저도잘몰르지만..........오늘 현장체험학습다녀왔어요..

지전에서는 종이를 파는곳이고요

입색전은 비단을 파는곳,

혜전은요 신발은 파는 곳,

상전은 생선과 과일은 파는 곳이에요

정조의 글 그림은 글파그림,국하그림,파직어필등이있어요

1762년(영조38)

          ↓

사도세자     스은묘

1776년(정조즉위)

 장헌세자    여우원

1789년(정조13년)

 정혼새저 수원으로 무덤 옮김     현륭원

1899년(고종)

 장조     융르릉

등...ㅋ

또한  

화성의 재료

-화성은 어떤 재료로 만들어 졌는지 써보세요

1.벽돌

2.나무

3.돌등이있구요
화성의 첨단무기

-공심돈 에는 어떤 무기들이 있는지 써보세요.

1,환도

2.제도검

3.쌍검등이있어요

 

2013-05-16 20:58 | 출처 : 본인작성

조창현(hyeo*****) | 답변 2 | 채택률 1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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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기도에 있다

2014-08-23 17:05 | 출처 : 본인작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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