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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구의 자랑스러운 인물 지식머니 50

윤아공주(yhh****) | 2013-05-03 17:55 | 조회 0 | 답변 7

제가 초등학교 3학년인데요,숙제 때문에 대구의 자랑스러운 인물 좀 알려주세요.지식머니 50드릴게요.


이 질문에 답변하시면 지식머니 5, 채택시엔 80 을 더 드립니다.
질문자, 네티즌 채택

눈의 꽃 | 소개 | 답변

전문분야 : 숙제도우미 | 만화,애니 | 답변 6929 | 채택률 84.4%
본인소개 : 1:1질문은 숙제도우미탭에 하시면 빠른 답변이 가능합니다

(대구의 자랑스러운 인물)

 

1.우배선 (1569-1621)


본관 : 단양

별칭 : 자는 사성
호 :  월곡

 
어려서부터 학문에 종사하였으나, 벼슬에는 뜻이 없어 향리에서 학문에만 종사였습니다.

  

1592년(선조 25)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24세의 나이에 대구에서 서사원 등과 의병을 일으켰는데, 그는 사재를 털어 의병을 모집, 화원 달성 등지에서 왜군과 싸워 연전연승하여 그 위용을 떨쳤다. 이러한 전공으로 인해 초토사 김성일의 천거를 받아 예빈사 참봉에 기용되었다. 그후에도 계속 왜군과 싸워 많은 전공을 세워 군기사( 판관이 되었으며, 이어서 합천군수에 임명되었으나 이듬해 관직을 버리고 귀향하였다.

 

그의 거처를 모르는 조정에서는 수소문 끝에 그를 찾아 1600년 금산군수에 명하였다. 그러나 사련원에서 정사를 전적으로 향리에게 맡겨 부역이 고르지 못하고 백성들이 유망사태를 빚게 되었다고 탄핵하여 파직시킬 것을 청하자 스스로 사직하였다.

 

1603년 다시 낙안군수를 지냈으며, 1604년에는 임진왜란 시의 전공으로 인해 선무원종공신에 책봉되었다. 광해군 때에는 두문불출하고 역학연구에 전념하였다. 덕동사에 제향되었다.
 
달서구 상인동의 월곡역사공원에 월곡 선생의 동상과, 월곡역사박물관, 단양우씨종가, 낙동서원 등이 있다.

2013-05-03 18:37 | 출처 : 한국백과

질문자 한마디

(윤아공주님)
답변 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질문자 채택

날마다행복73 | 답변 6241 | 채택률 95.5%

활동분야 : 영어 (2위) | 일본어 (2위)
본인소개 : 영어와 일본어에 주로 답변합니다. 역동적(力動的)인 것에 관심이 많습...

 

대구의 자랑스러운 인물

 

서거정(徐居正,1420~1488)   
 
서거정(徐居正,1420~1488)은 달성을 세거지로 한 대구 토성(土姓)인 대구(혹은 달성) 서씨 출신이다.증조부와
조부는 자인현(오늘날 경산)에 거주했으며,그곳에 선대의 선영과 농장이 펼쳐져 있었다. 그곳의 가옥과 농장은
형 서거광이 물려 받았으며, 이곳을 중심으로 대구 서씨의 족세가 뻗어나갔다.외가인 경기도 임진현에서 성장
하고 공부했던 서거정은 이런 연고 탓에 대구 경재소의 담당자(堂上)가 도었고,지역 소식에도 정통했다. 그는
지역출신 인사들이 과거에 급제하면, 동향 선배로서 그들을 밀어주고 후원을 아끼지 않았다. 서거정은 본관지
대구를 "내고향"이라 부르면서 친향(親鄕)에 대한 애특한 감정의 흔적들을 군데군데 남겨 두었다. 유명한"대구
10영(詠)"이 그 중 하나이다.


 

이상화(李相和,1901~1943)

 

이상화(李相和,1901~1943)는 일제 식민지 시기에 활동한 한국의 대표적인 민족 시인으로, 명시『빼았긴 들에
도 봄은 오는가』를 써서 민족혼을 일깨움과 동시에 한국인의 가슴에 영원히 지워지지 않는 아름다운 서정적
저항시를 남긴 1920년대 대표적인 시인이다. 1921년『백조』동인이 되어『말세의 희탄』,『나의 침실로』같
은 낭만적 서정시를 발표 하였으며,일본에 유학중 1923년 관동대지진을 만나 구사일생으로 귀국한 뒤 눈을
현실로 돌려 시『가장 비통한 귀욕』,『사상(街相)』,『조선병』,『빼았긴 들에도 봄은 오는가』 등의 명편을
『개벽』에 발표하였다. 이어서 평론『무산 자가와 무산작품(상,중,하)』등의 계몽적인 평론을『개벽』에 발표
했다. 1920년대 한국시는 일본으로부터 수입된 문예사조들인 낭만주의, 상징주의, 퇴폐주의 등이 무분별하게
사용되고 있었는데 이상화는 그러한 문예사조를 과감히 탈피하고 민족의 현실로 눈을 돌려 민족의 아픔이 서
정으로 조화된 빼어난 저항시를 남겼다. 그러나 시대와 민족의 장래를 염려하고 그것을 척결하지 못하는 식민
지 시인으로서의 울분이 너무 깊어 1943년 시인의 나이 43세 때 위암으로 영면하였다.

 


우배선 (1569-1621)

 

본관 : 단양
별칭 : 자는 사성
호 : 월곡

 

어려서부터 학문에 종사하였으나, 벼슬에는 뜻이 없어 향리에서 학문에만 종사였습니다. 1592년(선조 25) 임
진왜란이 일어나자 24세의 나이에 대구에서 서사원 등과 의병을 일으켰는데, 그는 사재를 털어 의병을 모집,
화원 달성 등지에서 왜군과 싸워 연전연승하여 그 위용을 떨쳤다. 이러한 전공으로 인해 초토사 김성일의 천
거를 받아 예빈사 참봉에 기용되었다. 그후에도 계속 왜군과 싸워 많은 전공을 세워 군기사( 판관이 되었으며,
이어서 합천군수에 임명되었으나 이듬해 관직을 버리고 귀향하였다. 그의 거처를 모르는 조정에서는 수소문
끝에 그를 찾아 1600년 금산군수에 명하였다. 그러나 사련원에서 정사를 전적으로 향리에게 맡겨 부역이 고
르지 못하고 백성들이 유망사태를 빚게 되었다고 탄핵하여 파직시킬 것을 청하자 스스로 사직하였다. 1603년
다시 낙안군수를 지냈으며, 1604년에는 임진왜란 시의 전공으로 인해 선무원종공신에 책봉되었다. 광해군 때
에는 두문불출하고 역학연구에 전념하였다. 덕동사에 제향되었다. 달서구 상인동의 월곡역사공원에 월곡 선생
의 동상과, 월곡역사박물관, 단양우씨종가, 낙동서원 등이 있다.

 


백기만 (1902~1967)

 

호 : 목우
필명 : 백태
활동분야 : 문학
출생지 : 경북 대구
주요작품 : 「꿈의 예찬」 「내 살림」 「기쁨」 「거화」

 

대구고보를 거쳐 일본 와세다대학 중퇴. 양주동, 유엽 등과 함께 「금성」지 동인으로 출발, 그 후 「개벽」
「여명」지 등의 편집을 맡기도 하였다. 초기에는 「금성」에 「꿈의 예찬」 「내 살림」 「기쁨」「거화(炬
火)」 등 많은 시를 발표하였다. 3. l 운동 때 대구의 학생운동을 주도하여 투옥된 것을 비롯, 광복 전까지 꾸
준히 항일운동을 벌인 지사적(志士的) 시인이기도 하다. 조선시인선집」을 편간하기도 했고, 1951년에는 「상
화와 고월」, 1959년에는 경북 작고예술가 평전인 「씨 뿌린 사람들」을 간행하였다. 1924년에〈청개구리〉
를 발표하여 두각을 나타내었다. 이후 그는 민족시인 이상화와 교유하면서 학생들을 동원하여 시위운동을 주
도하다가 붙잡혀 투옥되는 등 항일저항활동을 하였다. 특히 그는 이상화가 죽은 뒤에 대구 달성공원에 상화시
비를 건립하는데 앞장섰고, 이상화와 이장희의 시를 정리하여 「상화와 고월」 및「씨뿌린 사람들」을 간행하
는 등 대구와 경상북도 지역 향토시인들을 정리하는데 힘을 기울였다. 그의 시세계는 신선한 감각과 신비주의
적인 감수성을 기반으로 하며, 시형은 산문적인 호흡을 지니고 있는 것이 특징이라 할 수 있다.

 

일제말 많은 문인, 정치가, 교육자들이 훼절했지민 끝까지 뜻 굽히기를 거부했던 백기만은 지조의 인물이라
할것이요 그의 꿋꿋한 지조와 못다피운 예술의 열정은 그가 지은「대구 시민의 노래」말과 함께 길이 기억될
것이다. 대구시민의 노래 작사자인 그는 민족이 위기에 처했을 때는 철저히 저항했던 지사였고, 1920년대 이
후는 학국문단을 빛나게 했던 시인으로 활동했으며, 광복 이후에는 불의를 용납지 않던 언론인으로, 그리고
대구문화예술계의 거봉으로 한평생을 살아온 자랑스러운 대구의 인물입니다. 백기만 선생의 업적을 기리기 위
하여 1991년 두류공원에 시비를 건립하였으며 현재 인물동산내에 친구인 이상화 동상, 이장희 시비, 현진건
문학비와 같이 나란히 세워져 있다.


 

이갑성 (1889.10.23~1981.3.25)

 

본관 : 전주
호 : 연당
활동분야 : 독립운동
출생지 : 대구
주요수상 : 건국훈장 대통령장(1962)

 

독립운동가로 3.1운동 민족대표 33인의 한 사람이다. 1915년 세브란스 의학전문학교를 졸업한 그는 1919년
최연소자로 청년층을 대표하여 민족독립선언서에 서명하였습니다. 세브란스 의학전문학교를 비롯한 각급 학교
의 학생중심 시위운동을 주도하고 태화관을 중심으로 한 민족대표의 서명운동과 전단살포의 중책을 맡아 활약
하다가 일본경찰에 잡혀 옥고를 치루기도 하였습니다. 1924년 세브란스 의학의 지배인으로 활동하고 1926년
YMCA이사가 되어 항일청년운동을 지도하였습니다. 1931년 경성공업의 지배인을 역임하고, 같은해 신간회 사
건으로 상해로 망명 독립운동을 하였습니다. 1945년 광복을 맞아 바로 독립촉성국민회를 결성, 회장으로 활약
하였으며, 1947년 김규식 등과 협력 입법의원으로 활동하였습니다. 1950년 제2대 민의원으로 당선되었으며
1952년 국민회의 최고위원에 추대되었습니다. 자유당 말기에는 정치일선에서 물러나 조용한 생활을 하였으나,
1963년 민주공화당의 창당 때에는 그 발기위원이 되었습니다. 1965년 광복회장에 취임하여 독립유공자들의
복지증진을 위하여 노력하였고, 같은해 이준 열사 기념사업회 총재로 활약하는 한편, 삼일동지회 고문으로도
활동하였습니다. 80세 이후에는 민족대표 33인의 유일한 생존자로 3.1운동의 기념비적 인물로서, 해마다 거행
되는 3.1기념행사를 지켜보다가 1981년 92세의 나이로 여생을 마쳤습니다.


 

이상백 (1904~1966)

 

본관 : 경주
호 : 상백(想白) 또는 백무일재(白無一齋)
출생지 : 대구
주요수상 : 건국문화훈장 대통령장(1963)
주요저서 : 「조선문화사연구논고」 「이조 건국의 연구」

 

아버지는 시우이며, 큰형은 중국에서 독립운동에 헌신한 상정, 둘째형은 민족시인 상화이다. 구한말의 선각자
이며 큰 부호인 큰아버지 일우가 세운 우현서루에서 한학을 수학하고, 1915년 대구고등보통학교를 졸업하였
다. 이어서 일본 와세다제일고등학원을 거쳐, 1927년 와세다대학 문학부 사회철학부를 졸업하고, 1930년 일
본농구협회 임원을 거쳐 이듬해 일본체육회 상무이사에 선임되었는데, 1932년 제9회 올림픽대회 일본 대표단
임원으로 로스앤젤레스에 다녀온 후, 1935년 일본체육회 전무이사가 되었다. 이듬해 제11회 올림픽경기대회
준비위원으로 미국, 영국, 독일, 프랑스, 스웨덴, 폴란드 등을 방문하고, 1939년 와세다대학교 재외 특별연구
원으로 중국에 가서 2년 6개월간 동양학을 연구하였다. 그 뒤 와세대대학 동양사상연구소 연구원을 거쳐, 재
외특별연구원으로 중국에 파견되어 동양학연구를 더욱 깊이 하였다. 그는 일본에서 수학, 연구하는 동안에도
자주 서울을 내왕하면서 국내학계와 긴밀히 交遊하여 진단학회의 창립에 참여하고 「진단학보」에 논문을 게
재하기도 하였다. 1945년 경성대학 교수로 취임했고, 2년 후 서울대학교 문리과대학 사회학과를 창설하고 죽
을 때까지 사회학과 교수로 재직하면서 연구와 교육에 진력하였다. 또 1957년에 한국사회학회를 창설하고 이
학회의 11대 회장으로서 한국사회학계를 주도하였다.

 

8·15광복 후 1946년 서울대학교 문리과대학 교수가 된 후, 사회학과 주임, 부속박물관장, 동아문화연구소장을
역임하고, 1955년 문학박사학위를 받았다. 이 밖에 대한민국학술원 회원·국사편찬위원·한국사회학회장 등을
역임하였다. 특히 한국 사회학의 개척자로 활약, 조선왕조사 연구에도 업적을 남겼다. 그의 학문분야는 크게
국사학과와 사회학으로 나눌 수 있다. 국사분야의 연구는 「삼봉인물고」 「위화도회군고」 「재가금지습속의
유래에 대한 연구」 「고려말이조초에 있어서의 이성계일파의 전제개혁운동과 그 실적」등으로 여말선초의 사
회사 해명에 주력하였다. 이러한 그의 연구성과는 우리나라 사회사연구의 선구자로 평가되고 있다. 사회학분
야의 활동으로는 한국사회학의 초창기에 국내최초로 사회학과를 설립하고, 대학강의와 교양지 및 학술지를 통
하여 사회학의 보급에 주력한 것을 특기할 수 있다.

 

만년에 이르러 그는 국학, 동양학의 연구를 위하여 서울대학교에 동아문화연구소를 설립, 그 초대소장으로서
의 연구계획의 수립, 학술세미나의 개최 등에 많은 힘을 기울였다. 그는 고고미술에도 조예가 깊어 높은 식견
과 감식안을 지녀 서울대학교 박물관장, 국보 고적 명승 천연기념물 보존위원, 국립박물관 심의위원 등을 역
임하면서 그 방면에도 많은 공헌을 하였다. 이밖에도 훈민정음을 해설한 「한글의 기원」을 저술하였고, 많은
논설 국내외기행문 수필 등을 남겼다. 그는 일찍이 유명한 농구선수로 활약한 바 있으며, 그 뒤에는 체육이론
가로서 그리고 체육행정가 또는 체육계의 지도자로서 눈부신 활약을 하였다.

 

8. 15광복 후 조선체육동지회를 창설, 위원장이 되고, 1946년 조선체육회 이사장을 거쳐 1951년 대한체육회
부회장에 취임하였다. 제15∼18회 올림픽대회에서는 한국대표단 임원, 단장 등으로 활약하고, 1964년 대한올
림픽위원회(KOC) 위원장, 종신직인 국제올림픽위원회(IOC) 위원에 선출되었다. 1963년 건국문화훈장 대통령
장을 받았으며, 서울대학과 대한체육회의 공동장으로 고향에 안장되었다. 일본 체육발전에 이바지한 공로로
일본정부로부터도 훈3등 욱일중수장이 추서되었다. 1963년 건국문화훈장 등 생전에 여러 가지 훈장과 상을
받은 바 있으며, 1966년 타계하자 서울대학교 및 대한체육회 공동장으로 고향인 달성군 화원읍 구라동 선산
에 안장되었으며 죽은 뒤에는 모란장이 추서되었다. 저서에「조선문화사연구논고」「이조건국의연구」「한글
의기원」「한국사:근세전기편·근세후기편」「농구지도의 이론과 실제」 「서해도서」 등이 있고 역서에「정치
사회학」「사회학개론」 등이 있다.


 

이시영 (1882~1919)

 

본관 : 경주(慶州)
호 : 우재(又齋)
본명 : 중현(仲賢)
활동분야 : 독립운동
출생지 : 대구
주요수상 : 대통령표창(1963)

 

대구가 낳은 위대한 애국자요 항일 운동가인 우재 이시영이 있다. 1914년 베이징으로 망명하여 상하이 등지
로 왕래하며 항일무력봉기를 꾀하다가 국내에 잠입하여 활약하던 중 애국단사건으로 대구에서 체포되어 옥고
를 치렀다. 그후 안희제, 최준, 박상진, 서상일 등과 광복단을 조직, 구입하던 중에 다시 체포되었다가 풀려나
와 1919년 3·1운동 전에 지방 유림들을 상경하게 하여 독립선언서를 지방에 밀송시키고, 3·1운동 후 만주로
망명, 독립운동을 하다가 병사하였다. 1963년 대통령표창이 추서 되었다. 경북이 낳은 민족운동의 큰 별 김창
숙이 병석에서 나라 형편을 걱정하며 『우재가 살아있었다면 나라꼴이 이렇게 되지는 않았을텐데…』라고 한
탄했고 이범석 또한 같은 말로 그의 요절을 애석히 여겼다는 일화로 미뤄 우재의 항일민족정신이 얼마나 투철
하고 그의 인품이나 경륜이 동지들 사이에 존경의 대상이 되었는가를 짐작할 수 있다. 우재는 1882년 1월 10
일 대구에서 이관준의 둘째아들로 태어났다. 이관준은 호를 만당이라 했으며 성리학의 대가였다.

우재는 어릴 때부터 아버지로부터 한학을 배웠으나 문약한 선비로만 머물러 있지 않았다. 그는 몸이 건장하여
무인의 기상이 있었으며 그러면서도 글과 글씨, 그림에 모두 능했으며 말보다 실천이 앞서는 그런 성격이었
다. 이러한 그의 성격과 과단성 있는 추진력 때문에 도산 안창호는 그를『날개달린 호랑이』라고 칭찬해 마지
않았다 한다. 우재는 을사보호조약 체결 이듬해 스무다섯살 때 기울어가는 국운을 한탄하고 남의 나라를 삼키
려는 일본을 무찌르겠다는 결연한 각오 아래 중국으로 건너갔다. 그로부터 13년동안 그의 생애는 나라와 겨레
를 위한 가시밭길이었다. 그는 북경, 만주일대 그리고 국내의 각지를 그야말로 날개달린 호랑이처럼 휘돌아
다녔다. 괄괄한 성격의 그는 실력투쟁만이 독립의 길이라고 확신하고 윤상태, 서상일, 정운일 등과 애국단이란
비밀조직을 만들었다. 애국단을 조직한 그들은 우선 군자금을 마련하기 위해 서모라는 당시 대구부호의 지원
을 얻기로 했다. 그러나 서부자는 이름난 구두쇠인데다 민족의식이 없어 말로 해서는 응하지 않을 것 같았고
더욱 서는 우제의 사돈이었다.

 

우재는 서부자의 아들을 애국단에 가입시켜 그가 자발적으로 군자금을 희사하기를 원했으나 서부자는 끝내 모
른체 했다. 군자금은 마련해야겠고 저쪽에서는 응할 기미가 없자 최후 수단으로 하루밤 그의 아들을 앞세우고
그 집에 침범했다가 정체만 드러낸 채 실패하고 말았다. 우재는 일경에 체포되어 강도죄로 2년간 옥고를 치렀
다. 출옥한 후 우재는 다시 최준, 안희제, 서상일 등 동지를 규합하여 광복단을 조직했다. 광복단은 무기를 구
하고 병사를 길러 일본 세력에 무력으로 겨루자는 목적으로 조직된 단체이다. 1914년 우재는 다시 고국을 떠
나 북경으로 가 그곳에서 항일운동에 이바지했다. 우제가 그때 쓴 일기(손자 이용, 원화여고 교장 보관)를 보
면 백남채(제헌국회의원)와 늘 함께 일했음을 알 수 있다. 우제는 백남채 외에도 김좌진, 김동삼 등과도 많은
일을 했다. 1918년 귀국했고 이듬해 2월에는 지청천, 한용운( 등과 함께 영남유림 대표 2백여명을 서울로 보
냈다. 그 때 유림측에서 우제에게 민족대표로 서명해 달라고 하자『내 목적은 오직 왜놈과 싸우는 것』이라며
과격한 활동 노선을 밝혔다. 그 후 임시정부에서 재무부장관 서리를 맡아 달라는 것도 거절했는데 역시 같은
이유에서다.

 

3·1운동 직후 우재는 그를 따르는 한위건, 김영호 등 청년을 데리고 만주로 가서 유하현 삼원포에 한인무관학
교를 세웠다. 이 무관학교에서 인재를 길러내 힘으로 왜적을 몰아내겠다는 원대한 꿈이었다. 그러나 오랜 방
랑생활로 피로가 쌓였던지 그는 그 해(1919) 7월 9일 식중독으로 병을 얻어 서른여덟살 젊은 나이로 타계하
고 말았다. 광야를 휘닫던「날개달린 호랑이」가 그 큰 꿈의 한가닥도 펴지 못한채 북녘땅에 묻혔고 그 유해
조차 고국땅에 돌아오지 못하고 있다. 그가 타계했다는 소식을 들은 안창호는『문무 겸전한 우재가 갔으니 또
하나 큰 별을 잃었구나』땅을 치며 통곡했고 성제 이시영도『나라의 큰 별이었는데…』말을 잇지 못했다 한
다. 우재가 북경에 있을 때(35세) 쓴 다음 시는 고국 그리는 혁명가의 마음을 잘 나타내준다.

 

버들잎은 푸르러 작은 길을 덮는데 홀로 잔을 기우리니 감회가 깊구나
몇몇 곳을 떠다니며 마음 붙일 곳을 찾았던가.
어디서 들려오는 젊은이의 노래소리, 큰 일에 몸바쳐 천지를 떠도니 마음에는 거리낌없다.
고개돌려 고국길 보니 더욱 아득만 하고,
종일 돌아가자 애쓰나 이룰 길 없구나,
망연히 물러서 숲속에 핀 꽃을 꺾는다.
 

- 아래 사이트에 대구의 인물이 더j있어요.

대구의 인물  http://www.daegucity.net/bbs/board.php?bo_table=B146


- 인터넷 검색 및 편집

2013-05-03 18:52 | 출처 : 본인작성

질문자 한마디

(윤아공주님)
답변 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쉐잉(hyoj******) | 답변 6 | 채택률 25%

활동분야 : 해당 분야가 없습니다.
본인소개 : 입력된 정보가 없습니다.

짱 많음.................                                                       닉네임:쉐잉                  본명:진효재

최동보 [崔東輔, ?~?] 조선 선조 때의 의병.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의병을 일으켜 경산·영천 등지에서 복병전술로 적과 싸워 많은 성과를 올렸다.

 

정사철 [鄭師哲, ?~1593] 성리학 연구에 전심한 조선중기 학자.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의병을 모집하여 관군을 지원하기도 하였다. 문집에《임하집》이 있으며, 대구 금암서원에 배향되었다.

 

유사온 [柳思溫, 1573~1639] 임진왜란 때 의병장 권응수에 종사하였던 조선중기 학자. 정유재란 때에는 직접 의병을 일으켜 전투를 수행하고 관군의 군량을 조달하기도 했다. 문집에는《구정문집》이 있다.

 

박재헌 [朴在憲, ?~?] 독립운동가. 3·1운동 때 대구 계성학교 만세시위의 주모자로 학생을 동원하여 독립만세를 부르게 했다. 평양 숭실학교 재학중 국내사정을 선교사에게 전달해 국외에 널리 알리고 미국 의원단이 입국했을 때 선교사를 통하여 일제의 침략상을 폭로했다.

 

서병오 [徐丙五, 1862~1935] 서화가. 글씨는 행서, 그림은 매·죽·송·국 등 사군자에 뛰어났다. 시·글씨·그림·가야금·장기·바둑·의약에 능하여 8능이라는 말을 들었고, 중국·일본에 갔을 때는 그곳 명사들과 교류했다.

 

정재순 [鄭在淳, 1878~1948] 교직에 종사했던 독립운동가. 서문교회·안동교회 등에서 교직생활을 하며 독립정신을 고취하는데 진력했다. 신사참배 거부운동을 폈고, 광복 후에는 그리스도교 협회장 ·경북노회장을 지내면서 종교운동과 애국운동을 계속하였다.

 

이경희 [李慶熙, 1880.6.11~1949.12.4] 독립운동가. 의열단에 가입해 활동하였다. 김시현 등이 무기와 폭탄을 국내로 반입하자 격문 수백장을 받아 배포하였고 신간회, 밀양청년회에서 활동하였다.

 

이시영 [李始榮, 1882~1919] 독립운동가. 베이징, 상하이 등지로 왕래하며 항일무력봉기를 꾀하고, 국내활동 중 애국단 사건으로 옥고를 치렀다. 안희제·최준·박상진 등과 광복단을 조직했다. 3·1운동 전에 독립선언서를 지방에 밀송시켰다. 이후 만주에서 독립운동을 했다.

 

조기홍 [趙氣虹, 1883~1945] 《대한민보》를 인쇄하고 배포했던 독립운동가. 비밀결사를 조직하고 일본요인 암살과 일본군 시설을 파괴하려고 폭탄을 제조·은닉했다.

 

현정건 [玄鼎健, 1887.6.20~1932.12.30] 만주 임시정부에서 활동한 독립운동가. 고려공산당 창조파의 일원으로 임시정부 계파간 이견조정을 위해 힘썼다. 상해청년동맹회 등 여러 조직에 소속하여 항일투쟁과 전선통일을 위해 노력했다.

 

서상일 [徐相日, 1887~1962] 독립운동가·정치가. 대동청년당을 조직하여, 독립운동을 하였다. 대한민국 건국에 이바지한 공로로 대통령표창을 받았다.

 

이종암 [李鍾巖, 1896~1930.6.10] 독립운동가. 김원봉·김상옥 등과 의열단을 조직, 부단장으로 일본기관 파괴를 기도했으나 실패했다. 1922년 상하이에서 다나카 기이치 암살을 기도했으나 실패, 탈출했다. 상하이 임시정부 군자금을 모금하였다.

 

이인 [李仁, 1896.9.20~1979.4.5] 변호사·정치가. 광복 후 검찰총장, 초대 법무부장관, 반민족행위특별조사위원회 위원장을 지냈다. 유엔인권옹호한국연맹 이사를 지냈고, 5·16 후 야당원로로 야당통합을 위해 노력했다. 전재산을 한글학회에 기증했다.

 

이장희 [李章熙, 1900.1.1~1929.11.3] 섬세한 감각과 심미적인 이미지를 작품에 표출시킨 시인. 주요작품으로 《봄은 고양이로다》, 《하일소경》 등이 있다.

 

현진건 [玄鎭健, 1900.8.9~1943.4.25] 사실주의를 개척하고 근대 단편소설의 선구자인 소설가.《빈처》로 인정받기 시작했으며 《백조》, 《타락자》, 《운수 좋은 날》, 《불》 등을 발표하였다.

서동진 [徐東辰, 1900~1970] 화가·정치인. 1920년대 중반에서 1930년대 중반까지는 동인작품전을 주관하는 한편, 그림에 뜻을 둔 학도들의 모임인 영과회, 향토회 등을 결성·주도하여 수채화 보급과 지방미술의 발전에 공헌했다. 작품에서보다 미술운동을 통한 민족의식의 고취와 후진양성에 진력한 점에서 평가받는다.

 

박태준 [朴泰俊, 1900~1986.10.20] 작곡가. 대표작으로 《오빠 생각》,《동무생각:사우(思友)》 등을 작곡하였다. 서울여자음대, 연세대 음대교수로 역임하였다. 예술원상, 문화훈장 대통령장, 고마우신 선생님상, 소파상 등을 수상하였다.

 

이상화 [李相和, 1901.4.5~1943.4.25] 〈빼앗긴 들에도 봄은 오는가〉를 발표하면서 신경향파에 가담하였던 시인. 조선일보사 경북총국을 맡아 경영하기도 했다. 주요 작품으로 시 〈나의 침실로〉 등이 있다.

백기만 [白基萬, 1902~1967] 3·l 운동 때 대구의 학생운동을 주도하여 투옥된 것을 비롯, 광복 전까지 꾸준히 항일운동을 벌여 국가를 위해 몸을 바친 시인. 주요작품으로 《꿈의 예찬》, 《내 살림》 등이 있다.

 

김세용 [金世鎔, 1904~?] 사회주의운동가. 모스크바공산대학을 졸업하고 1944년 항일비밀결사 건국동맹에 참여하였다. 광복 후 조선건국준비위원회 재정부장, 조선인민당 국장·정치위원 등을 역임하였고, 남조선노동당 결성에도 참여하였다.

 

이상백 [李相佰, 1904~1966] 사학자·사회학자·체육인. 서울대학교 교수, 한국사회학회장를 역임했고, 한국사회학의 개척자로 활약, 조선왕조사 연구에 업적을 남겼다. 대한올림픽위원회 위원장, 국제올림픽위원회(IOC) 위원이었고, 일본 체육발전에도 공헌했다.

 

이규환 [李圭煥, 1904.2.28~1982] 영화감독. 초창기 영화감독으로 《임자 없는 나룻배》, 《무지개》, 《새출발》 등 비교적 수준높은 영화를 감독하였으며 광복 후 최초로 고전물인 《춘향전》을 감독하여 주목을 받았다. 서울특별시문화상을 수상하였고 국립극장운영위원으로 활동했다.

 

이응창 [李應昌, 1906~1973] 시인이자 아동문학가. 원화여고 초대 교장으로 임명되고 등단 이후에 창작활동보다는 아동문학의 보급과 아동문화운동에 주력하였다. 주요작품으로 《실버들에 배를 매니》 등이 있다. 경상북도 문학상을 수상하였다.

 

이효상 [李孝祥, 1906.1.4~1989.6.18] 교육자·정치가·시인. 6·7,9,10대 국회의원, 국회의장, 국제의원연맹(IPU)·APU 한국위원회 위원장, 공화당총재 상임고문 등을 지냈다. 경북대학교 학장, 영남학원 이사장을 지냈다. 저서《나의 강산아》,《교육의 근본문제》,《사랑》등 이 있다.

 

서진달 [徐鎭達, 1908~1947] 서양화가. 밝은 면과 어두운 면을 강하게 대비시킴으로써 화면을 역동감 있게 처리한 것이 특징이며, 세잔에 심취했던 그는 인물화뿐만 아니라 대담한 구도와 활달한 붓질이 두드러진 풍경, 정물에서도 세잔의 조형요소를 도입했다.

 

이인성 [李仁星, 1912.8.28~1950.11.4] 서양화가. 다수의 수상경력이 있고 1938년 개인전, 1940년 김인승·심형구와 함께 3인전을 가졌으며, 개인 아틀리에를 열어 후배를 양성하는 등 왕성한 활동을 보였다. 작품경향은 인상파적인 감각주의에서 그의 이국취향과 토속적 소재를 발전시켰다. 작품으로 《경주의 산곡에서》, 《실내》 등이 있다.

 

김용조 [金龍祚, 1916.3.16~1944.6.8] 서양화가. 조선미술전람회(1932)에서 여러 번 입선하여 작가적 기량을 인정받았다. 바다풍경을 즐겨그린 그림은 밝고 경쾌한 색채와 단아한 구도가 특징인데 현실의 고통에서 해방, 정신적 안정을 얻고자 한 의식이 반영된 것이다.

 

서상교 [徐尙敎, 1923.11.7~] 일제강점기 학생운동으로 항일활동을 펼쳤다. 태극단을 조직해 동지를 규합하고 조직을 확대해 나갔다. 식민통치에 대항하는 유인물을 작성, 배포하여 독립정신 고취에 힘썼다. 1943년 5월 일본경찰에 체포되었다.

 

박지수 [朴智帥, 1924.9.15~1973.3] 《변두리에서》, 《바보처럼》, 《해토 머리에서》 등 현실의식이 강한 저항적 경향의 시를 썼던 시인. 신민당에 입당하여 정계에 진출하기도 하였다.

 

김영일 [金永逸, 1925~?] 독립운동가. 중국 상하이로 건너가 광복군 화베이 지구 공작대원으로 활약했다. 1945년 5월 이후 국내침투작전계획을 담당·추진했다.

 

변종하 [卞鍾夏, 1926.7.28~2000.7.29] 한국적 이미지를 새롭게 탐구하는 서양화가. 홍익대학교, 수도여자사법대학, 서울대학교 교수를 역임했으며 런던의 쿠퍼화랑, 파리 시립미술관 등에 초대작가로 활동하였다. 《우화》, 《돈키호테》 등의 대표작이 있다.

 

김상길 [金相吉, 1926.12.29~] 독립운동가. 항일학생결사 태극단을 조직하여 활동을 시작했다. 조직확대와 항일유인물 살포에 힘쓰다가 발각되어 1944년 체포되어 복역하던 중 8·15광복으로 출옥하였다.

 

김남조 [金南祚, 1927.9.26~] 계관시인. 기독교적 인간애와 윤리의식을 바탕으로 사랑과 인생을 섬세한 언어로 형상화해 사랑의 시인으로 불린다. 주요작품은 《정념의 기》, 《겨울 바다》, 《설일》 등이다.

 

구자춘 [具滋春, 1932. 5. 11~1996. 2. 10] 제16대 서울특별시장, 제13, 14대 국회의원. 1974년 제16대 서울특별시장, 1978년 제38대 내무부장관을 지냈다. 1987년 정계에 입문하여 신민주공화당 부총재, 1988년 제13대 때는 공화당, 제14대 때는 민자당 국회의원을 지냈다. 1996년 자유민주연합 부총재 때 죽었다.

 

이영희 [李英姬, 1936. 3. 26~] 개량한복의 선두주자인 패션디자이너. 한복의 소박하고 투박한 이미지를 강조하여 단순하고 자연스럽게 표현한다. 1983년 워싱턴에서 미국독립 축하쇼에 참여하면서 국제무대에 데뷔한 뒤 세계각국에 한복의 아름다움을 소개하였다.

 

조영래 [趙英來, 1947.3.26~1990.12.12] 《전태일평전》을 집필한 인권변호사. 한일회담 반대, 6·8부정선거 규탄, 3선개헌 반대, 교련반대 등을 위한 학생운동을 주도하였으며, 변호사가 된 이후에는 망원동 수재사건의 집단소송, 이경숙사건 등의 노동·빈민·공해·학생관련사건 변론에 진력하였다.

 

문형렬 [文亨烈, 1955.10.15~] 시인·소설가·저널리스트. 1992년 《영남일보》에 《아득한 사랑》을 연재하기 시작하였는데, 통일 이후의 독일과 한반도를 배경으로 남북한 출신의 남녀를 주인공으로 하여 분단세대의 아픈 사랑을 그리고 있다. 작품은 《그리고 이 세상이 너를 잊었다면》,《바다로 가는 자전거》 등이다

2013-05-07 19:08 | 출처 : 본인작성

정호진(hoji*****) | 답변 2 | 채택률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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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상화 선생님,곽재우 장군 그거밖에 모르겠어요...

2013-05-14 21:15 | 출처 : 본인작성

개그맨(dnsl****) | 답변 9 | 채택률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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숙제 열심히 하거라 으흠~!

2013-05-21 18:51 | 출처 : 본인작성

겨울 왕국 엘사 | 답변 12 | 채택률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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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곽재우

곽재우는 대구에 자랑스러운 장군입니다.

그러니 꼭 기역해두세요!!

 

2013-05-26 18:33 | 출처 : 본인작성

김지은(rlaw********) | 답변 1 | 채택률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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곽제우,서상돈,서거정등이 있습니다.

2013-06-10 22:49 | 출처 : 본인작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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